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류수 전투 (문단 편집) == 발발 및 전개 == >十六年,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16년(242) 왕께서 장수를 보내시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242년]]) 242년, 고구려는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 대체적으로는 오늘날의 [[단둥시]]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사]]》에는 내몽골의 파림좌기 시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산시성 혹은 허베이성 일대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물론 《요사》 〈지리지〉 자체가 그리 신빙성이 높은 기록이 아니라는 점은 감안하여야 한다.]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때 [[패자#s-4]]의 벼슬을 지내던 고구려의 관리 득래(得來)는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동천왕]]에게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수 차례 간언하였는데, 동천왕이 습격을 강행하자 "이 땅이 곧 쑥대밭이 되겠구나."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이후 [[관구검]]이 고구려에서 승전했을 때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득래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주변의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그의 처와 자식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고구려]] 사람들도 득래를 현명한 사람이라 여겼다고 한다.] 하여간 이로 인해 244년[* 〈[[관구검]] 기공비〉, 《삼국지》, 《양서》 등 중국 측 사료에서는 244년이고, 《삼국사기》에서는 246년이다. 관구검기공비에 관련해서 논란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巍라는 글자를 썼다고 '한족 관료가 아닌 오환족이 세운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 글자는 정확히는 '魏' 자 전체가 아니라 '鬼' 상단에 '山'이 얹힌 형태인데, 이승호는 이를 '巍'가 아니라 '魏'의 이체자로 판독했다.[* 이승호,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 · 魏 전쟁의 재구성〉, 《목간과 문자》 15, 2015, 22쪽] 즉 논거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8월 유주자사 관구검이 [[오환족]]과 [[선비족]]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비록 전성기를 누리던 막강한 [[위(삼국시대)|위나라]]의 군대였으나, 당시 상황으로는 여러모로 고구려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관구검의 침공 바로 직전인 [[244년]] 초, 위나라가 [[촉한]]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가 [[흥세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기 때문이다. 당시 위나라 최대의 척신인 [[조상(삼국지)|조상]]은 [[사마의]]와의 권력 투쟁이 절정에 달하는 등 정치적 위기[* 249년에 터진 [[고평릉 사변]]은 [[사마의]]가 [[조상(삼국지)|조상]]으로부터 권력을 어느 정도 빼앗았다고 확신한 시점에서 터진 것이다.]에 몰리자 패전을 만회하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했다. 위나라의 [[고구려]] 공격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위군의 위력 역시 평소보다는 덜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천왕은 위군의 2배인 20,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했고, 자국에서 벌어지는 전투였으므로 지형적 이점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과연 고구려군은 비류수 위에서 싸워 위군을 격파했는데, 베어버린 머리가 무려 '''3,000여 급'''(級)이나 되었다. [[양맥 전투|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도 싸워]] 또다시 격파했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000여 명'''이었다. 전사자와 포로만 6,0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위군에게 입힌 것이다. 이런 엄청난 대승에 고무된 동천왕은 자신감이 흘러넘쳐 [[사망플래그|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 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위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은 그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이렇게 신이 난 동천왕은 철갑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나아가 마지막 남아있던 위나라 군을 격퇴하러 진격했다. 그러자 밀리던 관구검은 보병 방진을 쳐서 고구려군의 기세를 꺾고, 그 틈을 노려 결사적으로 싸워 고구려 기병을 대파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총 병력 20,000명 중 무려 '''18,000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동천왕은 겨우 1,000여 명의 병사와 처자식을 이끌고 [[옥저]]로 달아나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